깍듯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점원들, 세련된 복장, 언제나 산뜻한 공기와 청결한 바닥. 빛나는 장신구와 윤기가 흐르는 비단옷들은 늘 화연의 기분을 좋게 했다. 굳이 살 물건이 없어도 백화점에 들러 한 바퀴 돌며 새로 들어온 물건은 없는지 살피는 일은 어느새 일과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귀하다는 물건들만을 모은 박래품점을 열 테니까, 이건 하릴없는 한량짓이 아닌 셈이지. 암. 그렇고말고.’
그 누구도 묻거나 추궁한 적 없는 궁색한 변명을 속으로 중얼거리며 일각가량의 산책을 마치고 백화점 밖으로 나왔다. 미츠코시 백화점을 둘러보니 알이 굵은 진주로 만든 귀걸이나 목걸이 따위가 의상들과 함께 장식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진주가 유행할 모양이었다. 괜찮은 물건을 미리 들여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런데 얼마 걷지도 않았건만 하늘에서 물을 쏟아붓는 것 같은 장대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갑게 적시는 비를 피하기 위해 눈앞에 보이는 아무 가게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따뜻한 온기와 함께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이는 커피 향이 확 덮쳐왔다.
이런 가게가 있었던가?
이 근처에서 한참 공사를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불명확한 기억을 더듬으며 앉을 자리를 찾으려고 시야를 돌리니, 근사한 내부 공간과는 상이하게도 사람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런 기이함을 전에도 느낀 적이 있었다.
일본 군인들에 의해 공연 중이던 무대가 철거되던 날이 그러했다. 공연장 근처에는 그날따라 군인들이 유난히 많이 보였다. 팔을 타고 소름이 오르는 와중에도 극단 사람들은 공연이 유명해져서 일본 군인들까지 보러 왔나 보다 하며 애써 불안을 외면했다.
지금 느껴지는 감각이 꼭 그날과 같았다.
좋지 않은 예감이 팔끝을 타고 올라올 때면 화연은 버릇처럼 생각을 긍정적인 쪽으로 돌렸다. 불안한 고국의 현실과 순수하게 예술만을 이야기할 수 없었던 과거를 의식 저편으로 밀어 넣기 위해서였다.
상해예술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극단에 들어간 뒤로 화연이 출연한 극은 대체로 좋은 관객 반응을 얻으며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아무리 정치적인 입장을 담지 않는다고 해도, 점령당한 민족의 예술은 세상에 나서는 순간 그 자체로 정치적인 의미를 띠곤 했다. 극단의 간판배우였던 화연에게 일본 군부 차원의 예술 활동 금지 처분이 내려지자, 더 험한 일을 겪게 될까 염려한 화연의 아비는 급히 조선에 무역회사를 차려 딸을 피신시켰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을 떠올린다고 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화연은 잠시간의 상념을 의식 저편으로 밀어 넣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도 운이 꽤나 좋은걸?”
비도 피하고, 커피도 즐기면서, 이 넓은 공간을 혼자 독차지할 수 있다니.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었다. 물론 마셔보기 전까지는 커피 맛이 어떤지 알 수 없고,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이 공간을 계속 혼자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잔뜩 젖어버려 금세 차가워진 몸을 녹이고 옷가지를 말릴 수 있다면 커피 맛이 조금 쿰쿰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운이 좋을 수가.”
우산을 막 접으며 문으로 들어온 남자가 화연의 혼잣말을 들었는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분명히 밖에는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을 터였다. 우산을 쓰더라도 응당 젖은 부분이 꽤 있어야 했다. 그런데 눈앞의 남자는 우산까지도 보송하게 말라 있었다.
살아 있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희고 고운 피부. 까만 머리카락은 왁스로 넘겼는지 흐트러진 부분 하나 없이 단정했다.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빠져들어 그대로 실종될 것 같은 검은 눈. 단정하게 매인 넥타이와 베스트, 투 사이드 벤트 재킷까지.
꼭 누군가 화연을 유혹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만 같은 이상형이었다.
“괜찮으시다면 한 번 더 제게 운이 좋을 기회를 주시겠어요?”
직감은 눈앞의 남자가 위험하다고, 혹은 무언가 이상하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유례없이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럼에도 화연은 그것을 처음 보는 이상형에 가까운 남자에게 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은 눈앞의 사내가 소름 끼치게 잘생긴 탓도 있으리라.
이 주책맞은 입은 상황 파악을 끝내기도 전에 이름도, 정체도 모를 사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야 말았다. 입 밖으로 말을 내뱉고 나서야 화연은 속으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남자는 유려한 미소를 지으며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요청하는데 거절하는 것은 신사의 도리가 아니겠지요. 제게 커피와 다과를 살 영광을 주시겠습니까?”
변명을 하자면 화연은 이렇게 아무 사내에게나 자리를 함께하자고 청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고국에서는 오라비들 덕에 사내들과는 연이 없었다. 조선으로 오고 나서는 화교 사회의 상인회 같은 곳에 참석해도 어쩐지 겉도는 느낌이 강하여 사람들과 쉽게 부대끼고 어울리지 못했다. 그러니 사내에게 부러 말을 걸어 자리를 청한 것은 정말로 희귀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송화연이에요. 상해에서 왔고…… 저기 종로에 있는 자연무역공사(紫燕贸易公司) 경성지점의 사장이에요. 명함은…… 아, 여기에 있네요. 거짓말은 아니니까 나중에 찾아와서 확인해봐도 좋아요.”
자리에 앉자마자 화연은 클러치를 뒤져 늘 여분으로 몇 장쯤 가지고 다니는 자신의 명함을 테이블 위로 슥 밀어 사내에게 내밀었다.
작금은 가치가 변하고 요동치는 시기였다. 사내들은 여인에게 권력이 있어 무엇을 하겠느냐고들 말했지만, 권력이 있는 여인에게 약하게 나오는 것도 사실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권력보다는 권력에 딸려 있을 부와 명예를 탐내는 것이겠지만. 그리하여 제 아비가 손에 쥐여준 직함은 조선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기에 나쁘지 않은 보호막이자 무기가 되었다.
“이쪽에는 딸기가 얹어진 생크림 케이크와 커피 두 잔. 한 잔은 진하게.”
이 정도로 젊은 여인이 사업을 한다고 하면 사내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다. 정말 대단하다며 들러붙어 한몫 떼어먹으려 드는 유형. 혹은 아녀자가 무슨 사업을 하느냐는 태도를 은연중에 드러내면서도 여인의 뒤에 있을 집안이 두려워 대놓고 무시하지는 못하는 유형.
그런데 눈앞의 사내는 화연이 내민 명함을 흘긋 바라보기만 하고 종업원을 불러 주문했다.
“비에 젖어서 따뜻한 음료가 필요할 것 같아 멋대로 주문했습니다. 괜찮습니까?”
“주문을 마음대로 한 것 치고는 아주 능숙해 보이던걸요. 나는 음료보다는 그쪽 이름에 더 관심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너무 당돌한가?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하며 사내에게 이름을 물었다. 사내는 의외라는 듯 잠시 웃음을 터뜨리더니 자신을 한명운이라고 소개했다. 韓命運. 조선에서는 운명을 ‘운명’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지만, 중국에서는 명운(命运)이라고 불렀다. 운명처럼 만난 사내의 이름이 제 고국에서 운명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니.
이건 운명이 분명했다.
물론 운명이 아니라 하더라도 이 만남을 운명이라고 명명할 생각이었다. 이 사내를 본 순간 거세게 뛰는 심장도, 자신의 취향대로 잘생긴 외모도, 훤칠한 허우대도 모두 마음에 들었으므로.
눈앞의 사내를 제가 쟁취하겠다는 화연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명운은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타국에 아무런 연고 없이 보내진 연극배우 출신의 여인. 글을 쓰고, 예술을 사랑하며, 낙천적인 얼굴로 살아가는 부유한 여인.
그 곁에 부푼 꿈을 품고 조선에 들어와 사업으로 한탕 크게 해내고 싶어 하는 젊은 사내를 엮어놓으면 어떨까. 두 사람의 시대적 상황까지 적절히 얽어 연인으로 만들어놓는다면 썩 맛있는 비극 하나가 탄생할 것 같았다.
게다가 화연에게는 명운이 떠올린 사내에게 없는 부와 천진함이 있었다. 으레 이런 여인은 자신에게는 있으나 상대에게는 결핍된 것을 보면 보듬어주고 싶어 하기 마련이었다. 남자는 가난하고, 여자는 부유하다. 남자는 부에 목이 말랐으며, 여자는 가진 것의 의미를 종종 느끼지 못하면서도 생에 집착하여 빛나게 반짝이는 욕망을 사랑한다. 둘은 제법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될 터였다.
“도쿄의 와세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배우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정이 있어 조선으로 돌아온 참입니다.”
“어머나. 그럼 얼마나 여기에 머무르시나요?”
“아마…… 일 년 하고도 반년은 더 보낼 것 같군요. 다시 대학으로 돌아간 뒤에도 경성을 자주 오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대학에서 만난 친구와 조선에서 순회공연을 올릴 예정이니까요.”
눈앞의 미남자는 도쿄의 와세다 대학에 다니지만, 지금은 사정이 있어 잠시 경성에 돌아온 참이라고 했다. 그러나 조선에 머무를 시간이 고작 일 년 반이라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일 년 반 동안 눈앞의 남자를 제게 반하게 만들어 벗어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도 이 남자를 따라 도쿄에 잠시 자리를 잡는 편이 나을까.
짧은 순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은 제법 원대했다. 성격이 어떤지도 모르며, 고작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눈 것이 전부였건만 화연은 벌써 도쿄에 머무를 집을 구한다면 어디가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아버지라면 필시 기함할 것이다. 오라비들은 어디에서 굴러먹던 놈인지부터 알아야 한다며 사람을 붙여 뒷조사를 하려 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본래 사람의 마음은 물건을 들여오는 일과 달라서 수요를 헤아리고, 품질을 검수하고,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눈앞에 있는 사내는 제법 마음에 들었다. 찬찬히 살펴볼수록 흠잡을 곳이 보이지 않았다. 곧게 뻗은 콧날이며, 느슨하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눈매, 말을 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단정한 손가락까지도 그랬다.
무엇보다 화연은 자신의 배경이나 지위 따위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 구는 명운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사장이니, 상해에서 왔느니, 박래품점을 열 예정이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때에도 명운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대단하다는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여자가 무슨 사업을 하느냐는 식의 뻔한 비웃음을 내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흥미로운 책의 첫 장을 넘기듯 화연을 잠시 바라보고는 커피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런 순간에도 잘생겼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것에 잘 홀리는 것에 대해서 속으로 젠장할이라는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이 남자는 왜 이렇게 잘생겼담.
“그렇게 저를 빤히 바라보시면 곤란한데요.”
“왜요?”
“제가 괜한 오해를 할 것 같아서.”
“어떤 오해요?”
화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되물었다. 명운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낮게 웃음을 흘렸다. 화연은 그제야 자신이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사내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조금 민망하기는 했으나 시선을 거두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미 들켰는데 뒤늦게 조신한 척 굴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이런 점까지도 자신의 매력이라고 생각했으니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저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오해겠지요.”
“오해가 아닌데요.”
너무 곧장 대답했나.
그러나 입 밖으로 나온 말을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화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포크로 케이크의 끝부분을 잘라 입에 넣었다. 딸기의 새콤한 맛과 생크림의 단맛이 혀끝에 번졌다. 고작 비를 피하기 위해 들어온 가게였는데 케이크가 마음에 들었다.
명운은 뜻밖의 대답을 들었다는 듯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에는 기분이 좋다는 기색보다는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발견한 사람의 느긋함이 묻어 있었다. 화연은 그 미묘한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설령 알아차렸다고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눈앞의 이 남자가 제게 반하지 않았다면 지금부터 반하게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빗줄기가 차츰 가늘어질 즈음에는 창밖의 거리가 어둑해져 있었다. 화연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한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비가 내리거나 시간이 천천히 흘러도 좋을 텐데. 우산이 없다며 적당히 핑계를 대면 저녁 식사까지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비가 그쳤군요.”
그런 화연의 기대를 모르는지, 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지 명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어둑한 하늘 아래로 처마 끝의 빗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 아까까지 거세게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처럼 잦아든 것이다.
“아쉽네요.”
“비가 그친 것이요?”
“아뇨. 당신과 헤어져야 하는 것이.”
화연이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명운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희고 단정한 얼굴 위로 유려한 미소가 번졌다. 처음부터 정말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당돌한 여자였다. 눈앞의 여자가 비극을 대하는 태도는 어떨까. 무대 위에 오를 인물로는 조금 까다롭겠지만, 그만큼 풍부한 맛의 비극을 만들어주겠지.
“그렇다면 다음을 기약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다음이 언제인데요?”
“운이 좋다면 곧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나는 운이 꽤 좋은 편이에요.”
화연은 제법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명운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그것이 사실인지 앞으로 직접 확인해보겠다는 듯한 눈빛이었다. 운명을 비극으로 엮어내는 존재 앞에서 운이 좋다며 호언하는 여인이라니. 명운은 그 대답이 조금은 우습기도 했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다면 기대해보겠습니다.”
명운은 화연이 대로변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결심한 사람처럼 가볍고 경쾌한 걸음이었다. 젖은 치맛자락이 다리에 달라붙어 불편할 법도 한데 화연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명운도 그때마다 예의 바르게 손을 들어 화답했다.
그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야 명운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법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대개 사람은 명운의 앞에서 쉽게 긴장했다.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가까이 다가오기를 꺼렸고,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간혹 명운의 외양에 홀려 경계심을 잃는 이들도 있었으나, 조금만 오래 곁에 머무르면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을 느끼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살아 있는 것들은 본디 죽음을 멀리하고 싶어 하는 법이었다.
그런데 송화연은 달랐다.
불길함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카페 안으로 들어온 명운을 바라보는 순간 화연의 심장이 유난히 빠르게 뛰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팔을 타고 오른 소름도, 손끝이 조금 굳은 것도 보았다. 그럼에도 화연은 그것을 두려움이 아니라 설렘으로 해석했다. 제게 닿은 죽음의 기척을 첫눈에 반한 사내 앞에서 느끼는 떨림으로 착각한 것이다.
명운은 그 착각을 굳이 바로잡아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이용해볼 생각이었다.
타국에서 홀로 살아가면서도 낙천적인 얼굴을 잃지 않은 부유한 여인. 글을 쓰며 예술을 동경하고, 가진 것이 많은 만큼 결핍을 지닌 이를 외면하지 못할 것 같은 여인. 그 곁에 욕망으로 가득 찬 젊은 사내 하나를 가져다 놓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서로에게 없는 것을 탐하다가 끝내 서로를 망치게 될까.
명운은 오래도록 수많은 죽음을 보아왔다. 누군가는 사랑 때문에 죽었고, 누군가는 돈 때문에 죽었다. 누군가는 나라를 위해 죽었으며, 누군가는 아무런 까닭도 없이 길 위에서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 모든 죽음 가운데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제가 선택한 길을 걸어가다가 스스로 비극에 도달하는 이들의 이야기였다.
그리하여 명운은 화연에게 어울릴 만한 사내를 하나 떠올렸다. 때마침 조선에 들어와 있던 중국인 사업가였다. 이름은 진유헌. 상해와 경성을 오가며 직물과 약재를 취급하는 무역상이었고, 화연과 나이도 비슷했다. 훤칠한 체격에 말끔한 얼굴을 지녔으며 누구에게나 붙임성 있게 굴 줄 알았다. 머리도 좋았고 야심도 컸다. 무엇보다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둘은 썩 잘어울릴테지.
“어머나.”
그로부터 사흘 뒤, 화연은 경성역 근처의 서점에서 다시 한명운을 만났다. 서가에서 번역서를 꺼내던 화연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명운은 그보다 한 칸 옆에 놓인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절묘한 위치였다.
“명운 씨, 맞죠?”
“아. 화연 씨.”
“정말로 다시 만나는군요.”
“그러게요. 역시 나는 운이 좋은가 봐요.”
명운은 조금도 놀라지 않은 얼굴로 책을 덮었다. 화연은 반색하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명운이 들고 있던 책의 표지를 슬쩍 살펴보니 영문으로 된 시집이었다. 와세다에서 영문학을 배운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시는 좋아하세요?”
“좋아한다기보다는 자주 읽는 편입니다.”
“그게 좋아한다는 말 아닌가요?”
“죽음에 관한 시가 많아서요.”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시나 봐요?”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는 소재니까요.”
담담하게 말하는 것치고 내용은 평범하지 않았다. 그러나 화연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상해에서 연극을 하던 시절에도 화연은 유독 비극을 좋아했다.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죽음과 절망은 현실의 그것과 달랐다. 정해진 막이 내리면 배우는 다시 일어나 관객에게 인사를 건넸고, 관객은 눈물을 닦으며 극장을 나섰다. 죽음을 마음껏 들여다보면서도 누구도 실제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무대 위의 죽음을 통해 사람들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감정이 고조되는 것도 좋았다. 의욕이 고취되고 삶을 향한 열정이 다시 타오르는 순간도 좋았다.
“나도 비극을 좋아해요.”
“의외군요. 희극을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
“꼭 밝은 이야기만 좋아해야 하나요?”
화연은 입꼬리를 올리며 대답했다. 명운의 시선이 아주 잠시 화연의 얼굴 위에 머물렀다. 살면서 비극적인 일이라고는 한 번도 겪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이가 비극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흥미로웠다.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시간을 되돌려 화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살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맛있는 음식은 직접 공을 들여 천천히 음미하는 편이 더 취향이었으므로.
“비극은 비극이라서 아름다운 부분이 있잖아요. 피할 수 없는 끝을 알면서도 끝까지 발버둥 치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사랑스럽기도 하고.”
“사랑스럽다라…… 흥미로운 표현이군요.”
명운은 마치 처음 듣는 단어처럼 천천히 되뇌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서점을 나와 근처의 찻집으로 향했다. 화연은 사흘 전 카페에서 헤어진 뒤 떠올렸던 질문을 하나씩 꺼냈다. 도쿄에서는 어디에서 지내는지. 어떤 공연을 준비하고 있는지. 평소에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 명운은 대체로 성실하게 답했으나, 이상할 정도로 제 이야기를 깊이 풀어놓지는 않았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꼭 필요한 만큼만 대답하고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화연은 돌아오는 길에 문득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건만, 한명운이라는 사람의 윤곽은 오히려 처음보다 더 흐릿해진 기분이었다. 말투는 부드러웠고 태도는 정중했다. 좋아하는 책도 알게 되었으며, 잠시 조선에 머무르는 이유도 들었다. 그런데도 정작 그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 사람인지는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화연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아서, 더욱 알고 싶어졌다.
그 뒤로도 두 사람은 여러 번 우연히 마주쳤다. 화연이 단골로 드나들던 보석상 앞에서 만나기도 했고, 미츠코시 백화점에서 쇼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목에서 만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종로의 빵집에서 막 구워진 카스텔라를 사 들고 나오다가 마주쳤고, 또 어느 날은 극장 앞에서 새로 올라온 연극의 포스터를 살피다가 나란히 서게 되었다.
처음 두어 번은 화연도 기막힌 우연이라고 여겼다. 세 번째부터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섯 번째쯤 되었을 때에는 한명운이 일부러 자신을 만나러 오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운은 언제나 태연했다. 마치 경성이라는 넓은 도시 안에서 같은 사람을 며칠에 한 번씩 마주치는 일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는 듯 굴었다. 화연이 슬쩍 떠보아도 그는 유려하게 웃으며 대답을 피했다.
“또 만났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혹시 나를 따라다니는 건 아니죠?”
“제가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죠?”
화연은 어쩌면 눈앞의 사내가 자신을 따라다녔으면 하는 기대 어린 마음에 질문으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명운은 잠시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이 남자 어떻게 웃는 것까지도 완벽하게 잘생길 수가 있지? 정말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있다면 좋겠습니까?”
“조금은요.”
화연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이렇게까지 말하니 오히려 자신이 그를 좋아한다고 시인하는 것 같아서 조금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자신은 이 한명운이라는 남자에게 첫눈에 반했고, 이 기이한 만남들이 우연이 아니라 사내가 만들어낸 작위적인 만남이기를 바랄 정도였으니.
“그렇다면 비밀로 해두겠습니다.”
그런 식이었다. 한 걸음 다가서면 물러나는 것 같았고, 물러나는가 싶으면 다시 곁에 나타났다.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명운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보통의 사내들이라면 화연이 이 정도로 호의를 보였을 때 어떻게든 제 마음을 과시하려 들었을 것이다. 꽃을 보내거나, 식사 자리를 마련하거나, 필요하지도 않은 도움을 주겠다고 나서며 기회를 엿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명운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만나면 다정했고, 헤어질 때에는 미련이 없었다. 화연이 먼저 손을 흔들면 웃으며 받아주었고, 다음 약속을 명확히 잡으려고 하면 우연에 맡겨보자는 식으로 흘려버렸다.
화연은 점점 오기가 생겼다. 처음에는 그저 얼굴이 취향이라 눈길이 갔다.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는 차분한 말투와 묘하게 거리를 두는 태도가 궁금했다. 그 뒤로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눈동자 깊은 곳에서 잠시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졌다.
흥미인지, 호감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지.
화연에게 그 만남들은 기막힌 우연이었고, 어쩌면 운명이라고 불러도 좋을 사건이었다. 그러나 명운에게는 우연도, 구애도 아니었다. 막이 오르기 전에 배우의 성정을 살피는 일이었다. 어떤 말을 건네면 웃는지. 무엇을 보고 마음을 쓰는지. 어느 정도의 결핍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는지. 어떤 불행 앞에서 손을 내미는지. 화연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비극을 골라주려면 그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명운은 화연의 호기심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판단했을 무렵 진유헌을 소개했다.
장소는 경성의 한 중국 요릿집이었다. 화교 상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으로, 화연도 상인회 사람들과 몇 차례 식사를 한 적이 있었다. 명운은 아는 사람을 소개해주겠다는 말만 했을 뿐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았다. 화연은 처음으로 한명운이 정식으로 잡은 약속이라는 사실만으로 기꺼이 자리에 나갔다.
소개를 명목으로 잡은 약속이었으니 당연하게도 약속 장소에는 명운 혼자 있지 않았다. 그의 맞은편에는 낯선 사내가 앉아 있었다.
“소개하겠습니다. 진유헌 선생입니다.”
유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인사했다. 과연 한명운이 고른 사내답게 눈에 띄게 잘생긴 남자였다. 화연보다 조금 높은 키에 균형 잡힌 체격, 반듯한 이목구비와 사람 좋은 미소를 지니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양복은 몸에 꼭 맞았고, 손목에는 세련된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무엇보다 중국인이라는 점이 반가울 법도 했다. 타국에서 고향의 말을 자연스럽게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인사하고 있는 사람을 뻘쭘하게 세워만 놓을수도 없는 노릇이니, 화연은 눈앞의 초면인 남자에게 악수를 청했다.
“송화연이에요.”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상해에서 오셨다고요.”
“네. 진 선생도 상해를 자주 오가신다고 들었어요.”
“직물과 약재를 다루고 있습니다. 송 사장님의 무역공사에서도 직물을 취급하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앞으로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일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대화는 매끄러웠다. 그래서 어쩐지 누군가 매끄럽게 짜놓은 것 같은 이 상황이 조금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유헌은 사업 이야기를 할 때에도 지나치게 아는 체하지 않았고, 여인이 회사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화연이 상해의 극단에서 활동했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흥미롭게 질문을 이어갔으며, 최근 경성에서 유행하는 물건과 들여올 만한 직물에 대해서도 제법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누가 보아도 괜찮은 사내였다. 아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훌륭한 신랑감에 가까웠다. 생김새도 준수하고, 집안도 나쁘지 않으며, 사업 수완도 있었다. 중국인이라 언어와 문화가 통했고, 화연의 직업을 존중할 줄도 알았다. 명운이 무슨 생각으로 이 자리를 마련했는지는 몰라도 오라비들이 보았다면 유헌을 따로 불러 술자리라도 마련했을 것이 분명했다.
과연 한명운이 골라온 사내답게 흠잡을 곳은 없었다. 그러나 화연은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잘생긴 남자를 보고도 이토록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신기했다. 눈이 즐겁기는 했다. 그뿐이었다.
유헌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향의 말을 건네는 동안에도 화연의 시선은 자꾸만 명운에게 향했다. 찻잔을 쥔 손가락이나, 듣고 있는 듯 듣지 않는 듯 느긋하게 내려앉은 눈매 따위를 곁눈질로 훔쳐보았다.
명운은 맞은편에 여유롭게 앉아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유헌에게 이야기를 꺼낼 기회를 넘겨주고, 필요할 때마다 적당히 화제를 이어주는 모습은 꼭 능숙한 중매쟁이 같았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화연은 조금 기분이 상했다.
“두 분은 이야기가 잘 통하는 것 같군요.”
명운이 말했다. 고작 꺼낸 말이 그따위라니.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자신은 명운에게 도움이 될까 하여 이 자리에 나온 것이지, 이따위 중매를 위해 나온 것이 아니었다. 물론 상인회의 누군가가 소개한 자리였다면 업무상 만남 정도로 여기고 가볍게 즐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리를 만든 것은 자신이 반한 사내였다.
“그런가요?”
“같은 고향에서 오셨고, 하시는 일도 비슷하니 앞으로 자주 만나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명운 씨는요?”
“저 말입니까?”
“앞으로 저와 자주 볼 생각은 없나 보네요?”
유헌이 있는 자리에서 하기에는 조금 무례한 말이었다. 화연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명운이 마치 자신을 다른 사내에게 넘겨주려는 듯 굴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명운은 잠시 화연을 바라보았다. 유헌은 어색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물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닌 모양이었다.
“저는 두 분이 좋은 인연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자리를 마련했을 뿐입니다.”
“진 선생은 좋은 분인 것 같아요. 사업적으로도 앞으로 도움을 주고받을 일이 많을 것 같고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화연은 유헌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짜증나긴 하지만 눈 앞의 유헌이 제게 잘못한 것은 아니었으니 필요 이상의 무례를 저지를 필요는 없었다. 그러니 친구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고는 다시 명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내가 관심 있는 사람은 명운 씨인데요.”
유헌이 이번에는 기침했다. 화연은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말을 거두지는 않았다. 애초에 명운이 이상한 자리를 마련하지 않았다면 이런 민망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날 식사는 생각보다 빠르게 끝났다. 유헌은 다음 일정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떠났다. 화연은 그가 총총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명운을 돌아보았다. 명운은 조금도 난처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오히려 무언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진 선생에게 실례를 범했군요.”
“명운 씨가 제게 먼저 실례했죠.”
“제가 말입니까?”
“다른 남자를 나에게 소개했잖아요.”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사람이면 명운 씨가 만나세요.”
화연이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명운은 낮게 웃었다.
참으로 당돌한 여자였다. 분명 요 며칠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이어가면서 화연의 취향을 제법 파악했다고 생각했기에 진유헌을 소개한 것이었다. 보통은 소개 자리에서 그렇게까지 굴지는 않을 텐데. 이 여자는 일부러 무례하기로 작정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언행을 무례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는 상황이 제법 재미있게 느껴졌다.
“화연 씨는 진 선생과 같은 인물은 별로입니까?”
“그 정도는 아니에요.”
“그런데 진 선생은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잘생겼고, 능력도 있고, 말도 잘 통하고, 예의도 바르더군요.”
화연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며 유헌의 장점을 나열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지나치게 좋은 사람이었다. 아주 그림으로 그린 듯한 사람.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나를 위해 아주 성실하게 골라온 사람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당신이 아니잖아요.”
화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자신은 눈앞의 사내에게 만날 때마다 충분히 마음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명운이 이렇게 구는 것이 이제는 조금 짜증나기까지 했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싫은 것인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차고 싶었다.
“나는 당신이 더 궁금한데 왜 다른 사람을 보여줘요?”
짜증이 섞인 질문에 눈 앞의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건지. 이 사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짜증이 났다. 요릿집 바깥으로 나오니 어느새 해가 저물고 있었다. 거리 곳곳에 하나둘 불이 켜졌고, 축축한 밤공기 사이로 인력거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화연은 명운과 나란히 걷다가 몇 걸음 앞서 나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등 아래에 선 명운의 얼굴은 여전히 희고 단정했다. 처음 만났던 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같은 표정으로, 같은 온도로, 누구에게도 속내를 보여주지 않을 것처럼 서 있었다.
화연은 문득 한명운이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이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이야기를 구경하면서도 그 안에 섞여들지는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화연은 그 점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명운 씨.”
“말씀하십시오.”
“우리 한번 만나볼래요?”
“지금도 만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뜻 말고요.”
화연은 명운의 앞까지 되돌아왔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손을 뻗으면 명운의 옷깃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남녀유별을 따지는 풍조가 이전보다는 옅어졌다고 해도, 여인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구는 것은 여전히 흉이 되기도 하는 시대였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연애하자는 뜻이에요.”
화연의 말에 명운은 한동안 입을 떼지 않았다. 화연은 그 침묵을 거절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명운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만히 기다렸다. 처음 보는 사내에게 먼저 차를 마시자고 청했을 때에는 입이 머리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충동만으로 꺼낸 말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번 만났다.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고, 책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친절하지만 누구에게도 쉽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다. 그래서 이 남자를 더 자세히 알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가지고 싶었다.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무르며, 그 단정한 얼굴 아래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나를 좋아하느냐고 당장 묻지는 않을게요. 나도 아직 당신을 아주 많이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얼굴은 아주 많이 취향이지만요.”
“솔직하시군요.”
“내 얼굴은 마음에 들지 않아요?”
화연은 일부러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명운의 눈길이 잠시 화연의 얼굴을 훑었다. 빛을 받으면 부드럽게 반짝이는 검은 머리칼과 호기심으로 가득 찬 눈동자, 자신만만하게 올라간 입꼬리를 찬찬히 살펴보는 시선이었다.
“아름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됐네요.”
화연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눈앞의 사내가 말해주지 않아도 자신이 아름답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살아오면서 수많은 이들의 태도와 발언을 통해 충분히 확인한 사실이었다.
“서로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하나씩은 있으니, 나머지는 만나면서 알아가면 되잖아요.”
어처구니없을 만큼 단순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명운은 그 단순함이 싫지 않았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화연은 진유헌과 가까워져야 했다. 가진 것이 많은 여인과 더 많은 것을 탐하는 사내. 생을 사랑하는 사람과 생에 목마른 사람. 어울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필연적으로 얽힐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분명 재미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화연은 명운이 정성껏 마련해둔 이야기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눈앞에 보기 좋게 차려둔 비극을 옆으로 밀어놓고 이야기 바깥에 서 있던 명운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배우를 무대 위에 올리려고 했더니, 배우가 객석으로 내려와 연출자의 손을 붙잡은 셈이었다. 죽음을 구경하는 자를 제 이야기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그것이 조금 우스웠다. 그리고 제법 흥미로웠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짧았다. 화연이 조선에 머무르는 시간도, 자신을 향해 호기심을 품고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는 시간도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잠시 어울려주는 것 정도는 나쁘지 않았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한 여흥으로는 충분히 재미있을 것 같았다.
명운은 짧지 않은 침묵 속에서 눈앞의 여자를 가늠했다. 여차하면 무대에서 물러나 다른 이와 엮어주어 새로운 비극을 써 내려가면 될 일이었다. 그리 급할 것도 없었다.
“좋습니다. 만나보지요.”
“정말요?”
“제가 빈말을 하는 사람처럼 보입니까?”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화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괜찮아요. 앞으로 속속들이 다 알아낼 거니까요.”
거리 위로 바람이 불어와 짧은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명운은 손을 들어 화연의 뺨에 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넘겨주었다. 얇은 가죽장갑 너머로 스친 손길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서늘한 느낌이 남았다. 화연은 그 묘한 감각을 느끼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장갑을 늘 끼고 다니네요.”
“체온이 낮은 편이라서요.”
“내 손은 따뜻한 편이니까 괜찮겠네요.”
화연은 잠시 고민하더니 명운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을 얽는 대신 양손으로 감싸 쥐고 제 체온을 나누어주려는 듯 가볍게 문질렀다. 명운은 말없이 맞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살아 있는 인간의 온기가 얇은 가죽장갑 너머로 은근하게 전해졌다. 화연은 자신이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그 천진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수없이 많은 인간이 명운의 손을 잡았다. 살고 싶다며 애원하는 이도 있었고, 죽음을 앞두고 두려움에 떨며 매달리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손을 따뜻하게 해주겠다며 붙잡은 사람은 없었다.
“명운 씨. 이제부터는 화연이나 연이라고 불러도 좋아요.”
화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을 이었다.
“나는…… 당신을 아윈(阿运)이라고 불러야겠어요.”
화연은 방금 정한 애칭을 입 밖으로 꺼내보았다. 발음이 마음에 든다는 듯 한 번 더 입안으로 굴렸다.
“명운. 나의 아윈.”
운명. 제 고국의 말로는 꼭 그렇게 들렸다.
화연은 이 만남을 운명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처음부터 그러기로 마음먹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믿을 작정이었다. 설령 훗날 누군가 우연에 불과했다고 말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우연과 운명을 구분하는 것은 결국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의 몫이었으니까.
명운은 그런 화연의 생각을 알지 못했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가볍게 웃고 넘겼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송화연은 아직 잠시 무료함을 달래줄 여흥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특이하고, 조금 더 흥미로우며, 예상보다 오래 지켜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 인간. 그뿐이었다.
적어도 그날 밤까지는.